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10-15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지역별 관찰, 한국전과 아리랑 (18) 관찰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Behind of The Events of Korean War( XX)

newspaper update 4/20/2018



서두;
4월은 초목이 기지게를 켜고 봄을 만끽하면서, 긴 동면에서 일어나 아픈 상처와 쓰라린 과거에서 새날을 향해 가는 계절 같습니다. 이번달은 남북과 북미간의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위한 정상회담 준비에 숨가쁜 계절 같기도 하여 이계절과 아리랑과 관련된 미 제7사단의 인천상륙과, 그 사단가(師團昌)인 아리랑(Fig.1.은 실재 사진임) ,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남북이 함께 불렀던 아리랑, 그리고 전후에 희생되어 조용이 잠든 Washington Arlington 묘지 가까이에서 위로의 뜻깊은, 리틀 엔제스(Little Angels)의 아리랑 노래 공연을 관찰하고자 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 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만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니다.
11-1,편에서는 그유래를 , 2편,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지역별(地域別/Regional) 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 아리랑, 4-3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와 아리랑 연계 그리고,4-6 Hague밀사, 4-7미국편, 4-8미국의종편,4-9 러시아1편, 4-10 제 2편, 4-11 제3편,4-12, 4-13, 4-14 몽골(蒙古/Mongol) 4-15(I) , 4-16(II)고려인(高麗人)의 아리랑로드, 4-17북한의 아리랑, 4-18 한국전과 아리랑 관찰 입니다.


11-4-18 아리랑의, 미7사단 공식 행진곡(美七師團 公式 行陣曲/The Official Marching Song of Arirang )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보여주었던, 대원들과 Douglas MacArthur 장군이 등장하는데, 이 애국영화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한겨레 아리랑연합회가 MacArthur와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아리랑’의 이야기가 담긴 보자기를 공개했다. 한국전 참전 UN군 국기들과 태극기로 둘레를 채우고, 가운데에 아리랑 악보와 1절 가사를 수놓은 우승기다. 이 아리랑 비단 보자기는 이승만 대통령 부인 *이부란(李富蘭/Francesca 한국명)의 작품이다. 바느질을 잘한 이부란(Francesca ) 여사가 인천상륙적전을 성공시킨 MacArthur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자수 아리랑을 선물했다. 맥아더는 이 우승기를 7사단장 캘러웨이가 보관토록 했다 합니다.

이를 계기로 7사단 사단가가 ‘대검가(Baynonet)’에서 Fig.2.와 같이 아리랑으로 바뀌었다. 이들 미국 군악대 악보에는 아리랑은 물론 ‘아리랑 행진곡’과 ‘아리랑 판타지’ 등이 들어 있다. 손수건이나 전역기념 우승기에 아리랑 악보를 새겨 넣는 주한미군의 관행도 이때 생겼다고 합니다.
이후 이부란은 맥아더에게 준 것과 똑같은 우승기를 하나 더 만들었다. 그러나 2011년 여름 이화장이 수해를 당하면서 소실된 상태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는 ‘맥아더기/MacArthur Flag’로 통하는 이부란의 아리랑 우승기를 자체 제작, 보관해 왔다고 합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전쟁을 극복하고 참화를 달랜 MacArtur기(Flag)에서 저항, 대동, 상생의 아리랑 정신을 읽는다”고 밝혔다. 차 이사장은 맥아더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Rouni General (한•미 제1군단 초대군단장)의 저서 ‘운명의 1도’를 펴내며 6•25동란의 비화들을 발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부란(李富蘭) :Austria태생인 이여사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지여준 Francesca여사의 한국이름.

18-1. 왜 아리랑이, 한국전의 정전협적식에서 남북이 함께 연주했나(停戰協定 南北 同時昌/ How Played Together Two Korean Army in The Negotiations of War)

무거운 분위기속의 ,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전 세계의 시선은 판문점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후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전쟁을 중단하는 정전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 다음날 나온 <경향신문> 1면은 협정 서명식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3개 국어별로 인쇄된 휴전협정 조문 각 3통씩, 총 9통의 협정문서에 공산 측 대표 남일이 먼저 탁상에 준비된 펜을 들어 서명하였다. 이어 Harrison 중장의
서명이 있었다. 정전구획선을 획정한 지도를 건네면서 판문점에서의 조인은 12분 만에 끝났다. 말없이 서명을 마친 양측 대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각기 동•서 양쪽 출구로 나갔다 “ 라고 전해 집니다.

18-2 정전협정에서 남북 군악대가 함께 연주했던 곡은(南北韓 軍樂隊 同時 昌曲/What Kind Song Played in The Negociation Between South & North Korean Military Band).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악수도, 눈인사도 없이 헤어진 양측 대표단이 각자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은 바로 ‘아리랑’이었다고 합니다. 사전에 어떠한 약속도 없었지만 그 중요하고 엄숙한 순간,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아리랑이 민족 전체의 노래임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까지 벌인 두 나라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모습은 아리랑이 사상과 이념을 아우르고 화해와 안식을 부르는 음악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진행된 포로교환 현장에서도 ‘아리랑’은 양측 군악대의 단골 연주곡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였고.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었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18-3. 아리랑이 심리전에서도 활용(心理戰 活用昌/ Be used in psychological warfare)

아래의 사실에 입각한 기사에 의하면, 1951년 1월 12일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의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라고 전해집니다.

민족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었던 아리랑이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전쟁의 논리 앞에 무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Ref: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아리랑은 좋은 것’에서.

18-4. 아리랑은 민족과 국경을 넘었다(越耕 民族 國境/Arirang Spread Over Border)

한국전쟁은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20여 개국에 달하는 이국의 참전 병사들에게 아리랑은 ‘코리아’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흥얼거리는 아리랑을 들었고, 그들 부대에 배속되어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한국 병사들에게 이 노래를 배웠습니다. 또 유엔군 병사들이 귀국 기념품으로 사갔던 스카프에는 ‘지옥으로부터의 귀환(Returned from Hell)’이라는 문구 외에 우리 민요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1945년 9월 한국점령군의 일원으로 인천을 통해 들어와 3년 동안 주둔했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 미군부대로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미 7사단은 인천 상륙작전의 주력부대 중 하나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었습니다.

서울 수복에 일익을 담당했던 이 부대는 1950년 10월 28일 함경남도 이원에 상륙, 산수와 갑산을 지나 혜산진까지 진출합니다. 미 7사단은 압록강까지 도달했던 유일한 미군 부대였지만,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군의 1차 공세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단의 잔존병력은 그 해 12월 20일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18-5. 위싱톤에 울려퍼진 아리랑(아리랑 傳播/Arirang Spread Over Washington )

Fig.3.와 같이 리틀 엔젤스(Little Angels) 공연이었는데요, 한국 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한국을 도와줬던 나라들을 찾아가는 순회공연의 첫 순서였습니다. 공연의 주제는 “한국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전쟁이 터진 뒤 일주일도 안돼서 참전을 시작한 미국을 비롯해 영국과 콜롬비아, 이디오피아등 16개 나라를 일일이 도는, 그래서 공연기간만 1년이 되는 야심찬 기획이었습니다

아리랑이 울려퍼지며 공연이 끝나자 2천2백석의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이 모두 일어나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멀리 미국에까지 찾아와서 멋진 공연을 해준 어린 친구들이 기특하기도 했고, 60년이나 지났지만 자신들의 도움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성의가 고맙기도 했을 법 합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 인터뷰를 한 헤이스라는 흑인 할아버지는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리며 “이 노래는 정말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노래다. 한국전쟁때 많이 들었다.”며 신나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구슬픈 사연을 떠올리는 한국인들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아리랑 가락에서 60년전 낮선 나라 한국의 산과 벌판을 강행군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생전 가보지도,만난 본 적도 없는 나라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달라는 조국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해준 사람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국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분들에게 아리랑이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Ref : SB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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