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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와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고 있는 침묵의 목격자 !

   Posted : 12/7/2018 || 8:03 PM
덕수궁의 역사를 돌아보며 :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관헌은 고종이 러시아 건축가를 불러 새롭게 지은 연회와 휴식의 공간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고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정관헌을 자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정관헌이 서양 건축에 전통양식을 섞어 지은 전각이라면, 석조전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담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고 있는 침묵의 목격자, 덕수궁!

대한문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다. 그와 달리 1906년 이름을 고쳐 단 대한문(大漢門)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한양이 창대해진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 대한문의 위치는 처음 자리했던 곳이 아니다. 도로 앞쪽으로 33미터 남짓되는 곳이 원래 대한문이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태평로 길이 크게 뚫리면서 덕수궁 영역의 동쪽 부분이 크게 잠식당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또 다시 궁궐담장 뒤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대한문만 외로이 도로중간에 버려지듯이 서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덕수궁에는 원래 남쪽을 향하던 인화문이라는 정문이 있었지만, 중화전을 지으면서 인화문이 철거되자 자연스레 대안문이 정문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대안문’이라는 편액이 처음 내걸린 것은 1899년의 일이었고, 다시 1906년에 ‘대한문’으로 현판을 고쳐 달게 되었다.
덕수궁은 원래 경운궁으로 불렸으나 1907년 고종이 황제에서 물러나 태황제가 되어 경운궁을 거처로 삼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명문
광명문은 원래 고종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앞쪽의 정문이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덕수궁이 공원으로 전환되어 일반 개방되었고, 이어 1938년 이왕가미술관(지금의 덕수궁미술관)이 새로 건립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광명문은 1897년 함녕전이 지어질 때 같이 만들어 진 것으로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훼손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지금은 광명문과 역사적 관련이 없는 흥천사 종과 자격루의 일부, 신기전기 화차를 전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Source : heritage.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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